제목: 간디 자서전
글: 서기남
그림:박수로
독서기간: 2016.01.16~01.19
민서, 명서야... 오늘은 역시 이름이 너무 유명하여 이름만 알고 있었던 《간디 자서전》에 대해 말해 볼까 해.
간디는 1869년 10월 2일 구자라트 주 '포르반다르'라는 곳에서 태어났어. 간디의 가문은 수 세기 전부터 '토후국'의 총리직을 맡아 오고 있었지. 간디의 가문은 카스트의 최상 계급인 브라만도 아니고, 무사계급인 크샤트리아도 아닌 상인들로 이루어진 바이샤 계급에 속했지만, 그 지방에서 꽤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해 왔어. 사십 줄의 간디 아버지는 세 번째 부인의 허락을 얻어 아직 십 대를 벗어나지 못한 '푸틀리바이'와 다시 결혼을 했어. 세 번째 부인은 불치병에 걸려 있었거든. 이 네 번째 부인이 간디의 어머니고 딸 하나와 아들 셋을 낳았지. 그중 네 번째, 막내아들이 바로 간디야. 간디의 아버지는 그의 친척들을 사랑하고, 진실하고, 용감하며, 관대하고, 청렴결백한 사람이었어. 간디는 힌두교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는 비슈누교의 영향 아래서 성장했고 자이나교의 영향도 많이 받았어. 두 종교는 '모든 생명을 신의 창조물'로 보고 신성하게 생각하여, 농작물을 해치는 야생동물도 죽이지 않았지. 간디의 집에는 온갖 종교의 성자와 현자들이 찾아왔어. 아버지의 친구 중에는 이슬람교도도 있었다고 해. 간디는 이런 집안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면서 모든 종교를 인정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어. 간디는 열세 살이 되던 해 카스투르바이라는 소녀와 결혼했어.
1887년 열여덟 살의 간디는 대학 입학 자격시험을 치려고 근방의 큰 도시인 아메다바드로 갔어. 간디는 총점 625점 중 247점을 맞아 간신히 합격해 어쨌든 대학에 들어갔지만 성적은 형편없었다고 해. 간디는 종교상의 이유로 고기를 먹으면 안 되었는데 친구의 꾐에 빠져 고기를 먹고 고기를 먹기 위해 돈을 훔치고 나중에는 친구와 자살까지 시도했어. 한마디로 비행청소년이었지. 1학년 말 시험을 통과할 가망도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가족에게 도움을 주는 한 어른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가려면 영국에 가서 변호사가 되는 게 좋겠다고 충고했어.
19세의 간디는 영국으로 가 런던의 이너 템플이라는 법학원에서 공부를 해서 21살에 변호사 자격을 얻어 인도로 돌아왔어. 영국에서 간디는 처음에는 좋은 옷과 주거환경을 고집했는데 나중에는 검소해야 한다는 걸 깨닫고 열심히 실천하게 돼. 인도로 돌아온 간디는 변호사로서 성공하지는 못했어. 처음 맡은 소송에서 너무 떨려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주저앉아 버렸거든. 이 아빠와 비슷하네...ㅎㅎ 그러던 중, 형이 아는 사람이 간디에게 남아프리카의 소송 사건을 의뢰했고 간디는 그저 인도를 떠나고 싶어서 24살의 나이에 가족을 남겨둔 채 혼자서 남아프리카로 떠났어. 1년 기한을 생각하고 떠난 남아프리카에서 간디는 무려 22년을 살았어.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들이 받는 차별에 간디는 그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그는 어느새 남아프리카 인도인들의 정신적 스승이 되어 있었어. 남아프리카로 떠날 때 간디는 영국식 신사 복장을 쫙 빼입고, 꼭 1등석을 타고, 영국 없는 인도는 있을 수 없다고 믿는 영국식 생각이 들어찬, 20대의 젊은 변호사였지. 그러나 22년 후인 1915년, 46살에 인도로 돌아올 때의 간디는 인도 노동자의 복장을 하고, 3등석을 타는, 인도 사람들의 새로운 지도자로 변해 있었어. 그곳에서 펼친 '사티아그라하' 운동은 '진리의 힘'이라는 뜻으로 잘못된 것을 폭력 없이 공개적으로 거부하는, 간디의 비폭력 운동을 부르는 말이야.
인도로 돌아온 후, 1917년, 48살의 간디는 '참파란 지방'(어팔 근방)의 농민들이 영국인 지주들의 부당한 세금에 시달리는 문제를 해결해주기도 하고, 아슈람 근처 방직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을 도와 임금을 올려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등 진짜 인도 사람들을 위한 일을 했어.
제1차 세계대전에 영국을 도왔지만 영국은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롤래트' 법을 시행하려고 하여 간디는 전 인도 사람들이 상점의 문을 닫고, 학교에도 가지 않고, 공장도 가동을 멈추는 '전 인도의 총파업'을 일으켰어. 영국은 평화적인 집회를 벌이고 있던 사람들을 무력으로 제압했지. 이 일로 인해 간디는 영국을 다르게 보게 되었어.
영국은 '사티아그라하' 운동으로 간디를 체포해서 6년형을 선고했어. 간디가 감옥에 있는 사이 독립운동은 지도자를 잃고 중단되었고,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에는 심각한 대립이 전개되고 있었어. 간디는 힌두교와 이슬람교 간의 화해를 위해 21일간의 단식을 했어.
간디는 다시 인도 국민회의를 이끌며 1928년까지 1년 이내에 인도에게 주권을 달라는 요구를 내걸고 인도가 완전한 독립을 달성할 때까지 전국적인 비폭력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하고, 사실적으로 사티아그라하를 시작했어.
간디는 또한 불가촉천민들의 인권을 개선하는데 앞장섰고 그들의 차별을 없애는데 어느 정도 기여했어.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 측의 승리로 끝나고 인도는 독립을 향해 순항했는데 이슬람 연맹의 지도자 진나가 '이슬람교의 파키스탄'과 '힌두교의 인도' 즉, 두 개의 인도로 독립할 것을 주장했지.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는 서로 죽고 죽이는 상황이 되어 버렸어. 75살의 간디는 종교의 갈등을 없애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마침내 독립했고, 파키스탄도 독립했어.
1948년 1월 30일, 78살의 간디는 평소처럼 오전 3시 30분에 일어나 아침 기도를 하고, 오후 5시 10분 공개 기도회장으로 나갔어. 순간 땅딸막한 젊은 남자가 군중을 밀치며 나와 간디를 향해 총을 세 발 쏘았어. 그는 힌두교의 과격파였어. 화장터에 200만 명의 인도인들과 세계 여러 곳에서 유명한 사람들, 높은 사람들이 간디에게 국가 원수로서의 경의를 표했어. 죽을 때 그는 아슈람에서 만든 두 켤레의 샌들, 도둑맞았다가 도둑이 다시 돌려준 시계 하나, 간디가 몸에서 떼어 놓은 적이 없는 힌두교의 경전, 이슬람의 경전 몇 권과 두 손을 귀에, 눈에, 입에 대고 있는 상아로 만든 세 마리 원숭이 외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고 해. 그 원숭이들은 나쁜 것은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해.
어때, 민서, 명서야? 간디의 삶은 성인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아. 그런데 간디가 어렸을 때는 일반 사람들과 똑같았다는 거야. 그는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닫고 실천했어. 사실 이게 힘든 거거든. 알고 있는데도 행동으로 하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어. 그런데 간디는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신의 생각대로 실천했지. 간디의 어렸을 때는 아빠와 비슷했는데 어른 삶으로서의 아빠는 부끄럽기까지 하구나. 이 책으로 아빠의 존경하는 인물에 간디가 추가되었어. 우리 민서, 명서도 학교 공부보다도 삶에 대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많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2016.01.21..11:13... 민서, 명서는 유치원 가고 아빠도 출근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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