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72.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44-조선상고사(신채호)

삶의 기쁨 독서 이야기

by Jinnyboy 2016. 3. 6. 11:35

본문

 

 

 

 

제목: 조선상고사

글: 김대현

그림: 최정규

독서기간: 2016.03.04~03.05

 

민서, 명서야... 오늘은 탄압의 시대에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려 노력한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꾸나.

 

민서, 명서도 나중에 학교에서 신채호 선생님에 대해 배울 거야.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 중 한 분이셔.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시골 가난한 양반집에서 태어났어. 비록 망해 버린 양반 집안이었지만 그는 조선 시대 영의정을 지낸 신숙주의 18대손으로 태어났단다. 신숙주는 세종대왕 당시 한글을 창제할 때 크게 기여한 뛰어난 학자였는데, 세조가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을 때 사육신을 배반하고 세조를 도왔던 사람이지. 조상과 똑같이 훌륭한 두뇌를 가졌지만 의리의 힘은 틀리는구나.

신채호가 태어날 무렵에는 집안이 몰락하여 충청도 고두미라는 시골에서 살고 있었단다. 그래서 굶는 날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먹을 것이 있는 날이라고 해봐야 콩과 보릿가루에 쑥을 넣어 만든 죽이 전부였어. 그래서인지 훗날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할 때도 콩죽을 먹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지금과 비교하면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알고는 있니?

유학자였던 할아버지 아래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할아버지 방에 있는 책을 열심히 읽고 또 읽었지. 하지만 학구열을 채워줄 수 없게 되자, 할아버지는 신채호를 데리고 목천의 신기선 대감에게 부탁하여 그 집의 책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단다. 우리 주위에는 책이 너무 많아 다 읽지도 못하는데 책이 없어 읽을 수 없었다니 상상이 가지 않을 거야. 이런 신채호를 기특하게 여긴 신 대감은 1898년 신채호를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 이곳에서 신학문과 관련된 책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고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졌어. 3년간의 성균관 공부를 마치고 잠시 고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신채호는 1905년 성균관에서 시험을 보고 박사가 되었어.

 

그 후 <황성신문>에서 논설을 썼지만 1910년 9월 폐간되고 말았어. 그리고 영국인 베델이 운영하는 <대한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겨 언론활동을 계속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사표를 쓰고 신문사를 떠났지. 결국 망명의 길을 결심하고 러시아의 연해주로 떠났어. 그 후 러시아에 1년 정도 머물면서 <권업신문>을 창간해 언론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다음 해에 중국 상하이로 떠났어. 이 시기에 신채호는 우리나라 고대사의 유적지를 답사할 기회를 갖게 되었어. 이런 상황에서 신채호의 마음에 분노를 일으킨 사람이 하나 있었어. 바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란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 만주 지역의 역사를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넓은 땅과 자랑스러운 역사를 모두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어.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서자 신채호도 독립에 대한 기대를 갖고 상하이로 갔지만 그곳에 대한 기대가 채워지지 못해서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왔단다. 이후 신채호는 베이징의 젊은 조선인 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청년단이란 조직을 만들고, <천고>라는 잡지를 만들어 한국의 독립 의지와 역사를 중국인들에게 알리기 시작했지.

1927년 신채호는 중국에 와 있던 일본, 타이완, 인도, 베트남의 무정부주의자들과 함께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이란 단체를 만들고 자금을 구하러 타이완으로 갔지만 사전에 계획을 알아차린 일본이 신채호 선생을 체포하고 말았어.

신채호는 1929년 10월 3일, 첫 재판을 받았고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는데 1936년 2월 21일 뇌일혈이란 병으로 그만 쓰러지고 말았어. 일본은 신채호가 감옥에서 죽을 경우 여론이 나빠질 것을 우려하여 그를 병보석으로 놓아주려고 했지만 신채호는 이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어. 정말 일반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의지를 가지신 분이란 걸 느낄 수 있지 않니? 그리고 <조선일보>에 연재하고 있던 '조선상고문화사'의 연재를 스스로 끊었는데 그 이유는 이 시기에 <조선일보>가 변절을 해서 일본식 연호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지금도 <조선일보>란 이름으로 버젓이 영업하고 있단다.... 결국 1936년 2월 21일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 의사도 1910년 생을 마감했던 이곳에서 57살의 나이로 최후를 맞는단다.

 

사실 <조선상고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와는 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 것이 많단다. 하지만 민족주의 사학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높여 독립을 이루려 역사를 다른 방식으로 연구했단다. 물론 터무니없이 소설처럼 쓴 것은 아니지.

신채호는 책을 많이 읽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분명한 사람이어서 자신이 처한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자신감의 회복이라고 생각했어. 더구나 신채호를 화나게 한 것은 일본인들이 일부러 우리나라의 역사를 왜곡한 사실이었어. 우리의 고대사를 기록한 《삼국사기》를 읽던 신채호는 이 책의 편찬을 총책임졌던 김부식의 역사관에 화가 났어. 이 책은 삼국시대의 우리 역사 중 신라 역사를 중심으로 서술했기 때문에 통일 이후 발해 역사는 빠지고 말았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우리나라의 영토를 대동강 이남으로 축소시키고 말았고, 중국과의 관계를 서술할 때 무조건 우리가 중국을 큰 나라로 섬겼다는 사대사상을 바탕으로 서술했다고 이해했어.

신채호는 자신이 쓸 조선사에 국내에서 그가 읽었던 수많은 역사책과 중국에서 만난 중국의 역사책, 그리고 비록 나라를 잃고 망명객이 되었지만 만주 지역을 답사하면서 확인했던 우리 고대사의 웅대함을 담고자 했단다. 만주지역 하면 생각나는 나라는 고구려지. 그래서 신채호가 쓴 <조선상고사>는 고구려의 역사가 중심이 된단다.

이 책은 신채호 선생님이 뤼순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할 때인 1931년 6월 10일부터 같은 해 10월 14일까지 총 103회 동안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내용이란다. 하지만 중간에 쓰러지는 바람에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고 그만 뤼순 감옥에서 눈을 감고 말았지. 해방이 되고 3년 뒤인 1948년, 신채호의 원고를 <조선일보>에 싣도록 주선했던 안재홍이란 분이 연재했던 내용을 모아서 《조선상고사》라고 하는 한 권의 책으로 엮었어. 원래 신문에 연재할 때는 <조선사>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했지만 연재를 끝까지 못하고 중간에 멈추었기 때문에 《조선상고사》가 되었던 거야.

 

민서, 명서야. 이 책의 내용을 읽고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책을 쓰신 신채호 선생님의 정신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단다.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썼는지, 왜 썼는지 말이야. 그 정신은 신채호 선생님이 역사를 정의하는 데에서 잘 알 수 있어.

 

"역사란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발전하고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심적활동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우리가 투쟁하여 독립해야 하는 의미가 잘 담겨있단다. 지금 시대에 우리가 정신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육체적으로는 편안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이때의 절절한 마음을 알기가 힘들지만 이런 신채호 선생님의 정신은 최소한 꼭 이해하고 있어야 한단다.

 

2016.03.06.11:33.... 아침 식사 후 너희들은 짱구 보고 있을 때... 아빠가.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