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존 메이너드 케인스
글: 재커리 D. 카터
번역: 김성아
독서기간: 2023.11.17 ~ 2023.12.03
민서, 명서야~~ 오늘은 세계 최고의 경제학자이고 현재도 케인스 주의자들이 추종하는 케이스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어. 많은 천재들도 한 분야에서 세계의 발전에 이바지했으나 주식투자에서는 처참한 결과를 냈지만 케인스는 주식투자에서도 많은 수익을 냈어. 그는 사람들과는 다른 발상으로 국가를 구해냈어. 그러기에 천재라고 할 수 있단다.
01 케인스, 금을 구하러 런던으로 오다
케인스는 케임브리지를 입학하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냈어.
그의 총명함에 지식인 클럽인 '사도회'에 합류했고 이곳에서 그의 명석한 논리는 후에 영국 재무부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졌지.
케인스는 더 자유로운 사상 무장과 빅토리아 시대의 구습을 뒤로하는 '블룸즈버리' 클럽에 들어가게 돼. 여기는 유명한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도 합류했어. 그들은 예술, 문화, 무절제한 성행위, 동성애를 통해 자유를 만끽했지만 정치에는 무관심했어. 그러나 인도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던 케인스는 세계 제1차 대전이 벌어지자 금융위기가 일어나기 일보직전인 영국 정부의 부름을 받았어.
금본위제 속에서 각국은 영란은행에서 금을 인출하기 바쁜 가운데 케인즈는 오히려 금을 원하는 타국에게는 금을 인출해주고 국내는 새로운 화폐를 통해 금융위기를 안정시키려 했고 이는 적중했어. 이때 영국의 고위층은 그가 천재임을 알아보았겠지.
금융시장이란 경제학자들이 교과서에서 설명한 것처럼 깔끔하고 질서 정연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게 됐다. 시장가격의 변동은 개인의 이득을 추구하는 이성적인 행위자들이 축적한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를 헤쳐 나가려는 결함을 가진 인간의 판단에 불과했다. 시장 안정은 균형점을 찾는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가 아니라 질서, 정당성, 신뢰를 유지하려는 정치권력에 의해 더 많이 좌우됐다.
02 피로 물든 돈
블룸즈버리에는 버지니아 울프를 비롯해, 리튼 스트레치, 레너드 울프, W. B. 예이츠, E. M. 포스터도 들렸어.
케인스의 동성애 취향은 왠지 그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지만 늘 천재는 누구도 상상치 못하는 법이니까.
블룸즈버리 멤버들은 케인스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몹시도 싫어했어.
이들은 결국 정치에 따라 자신들의 운명도 결정된다는 것을 잘 몰랐던 것일까?
그래도 이들은 근본적으로 평화주의자였어. 케인스도 이들을 의식하면서 전쟁보다는 평화를 이루는데 더 힘을 썼어.
전쟁광들이 전쟁에 몰두하려 할 때 케이스는 이들을 도와야 하는 점이 몹시 거슬렸겠지.
전쟁이 벌어지면서 영국은 재정적으로 위기를 맞이했지만 미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국가부도를 모면했어.
게다가 우드로 윌슨 대통령 선전포고를 하고 윤리적 조항을 내세우며 유럽은 평화 분위기로 돌아섰어.
윌슨 대통령이 각 민족은 각 나라를 세울 권리가 있다고 했지만 우스운 점은 그는 철저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단다.
03 실망으로 점철된 파리평화회의
케인스는 패전국에 대한 배상금 협의 등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정부단에 포함되어 파리로 향했어.
그에게 첫 실망을 안겨준 건 다름 아닌 영국 정부였어. 정치적 이유 등으로 독일에 터무니없는 배상금을 요구한 거야.
이런 식으로 프랑스의 클레망소 총리와 미국 윌슨 대통령까지 서로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어.
케인스는 유럽에 평화를 가져오려면 부채 탕감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어. 이를 통해서 각 국은 부를 창출할 수 있지만 이런 노력으로 외국의 빚만 갚는다는 것을 국민은 납득하지 않을 거라 했어.
그러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단호하게 거절했어. 미국 역시 대의를 내세우며 자신의 실속을 차리려 한 거지.
파리평화회의에 염증을 느낀 케인스는 사임을 했어. 분노와 수치심을 느낀 채로...
04 평화의 결과
케인스는 던컨과 바네사의 농가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
케인스는 런던은행이나 스칸디나비아 은행에서 영입 제의가 왔지만 모두 거절했어.
그리고 그가 쓴 《평화의 경제적 결과》는 큰 파장을 몰고 오며 케인스의 가치를 증명하며 유명인사로 만들었어.
이 책은 현재까지도 획기적 정치 이론서이며 설득력이 강한 경제서 중 하나라고 하는구나.
케인스는 보수적 정치 성향을 가진 에드먼드 버크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 하지만 모든 이론을 따르지는 않았고 세계 질서는 역사적 사회의 산물이 아닌 정치 기술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했어.
이 책에서 파리평화회의에서 보여준 영국의 로이드 조지 총리, 클레망소 총리, 윌슨 대통령을 조롱과 비난으로 묘사했어.
이런 용기는 어디에서 난 것일까? 심지어 정부를 대표해 근무를 했음에도 말이야.
이 책은 케인스의 경력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평화의 경제적 결과》의 성공은 블룸즈버리 클럽의 이상주의가 세계무대에서 통했다는 승리의 징표가 됐지만 케인스가 영국 정부와 쌓은 친분에 금을 내면서 정부에 복구할 기회를 날려버렸다. 수년 만에 다시, 케이스는 앞으로의 삶을 설계해야 했다.
05 형이상학의 세계에서 돈의 세계로
케인스는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갔어.
그는 러셀과 관계를 맺으며 이제 적군이 되고 포로가 된 비트겐슈타인의 책에서 영감을 얻고 경제인으로 돌아간단다.
즉, 현실에서 확률로 미래의 일을 예측하지만 이런 수학적인 요소의 통계적 빈도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돼.
주식 투자로 꽤 큰돈을 벌었지만 중간에 모든 돈을 날리고 다시 대출을 받아 크게 성공한단다.
그는 경제의 단면들을 잘 이해했고 미래의 방향을 제대로 예측해서 무척 큰 돈을 벌었어.
이 시기에 그는 발레리나인 리디아 로포코바와 사랑에 빠져.
케인스는 게이였지만 이렇게 여자와 사랑에 빠진 적이 없었어.
물론, 리디아를 사귀고 2년 간은 다른 남자를 곁에 두기도 했지만 말이야.
어쨌든 리디아는 케인스의 든든한 응원군이었고 또 정신적 안식처였어.
케인스는 자유무역의 폐해를 느끼고 이를 시정하기에는 신념의 일부를 버려야 했어.
영국의 디플레이션은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아내렸고 기업은 파산을 하여 실업자들이 넘쳐났어.
그러자 영국의 기득권은 금본위제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어. 케인스는 이를 실행하면 고통만 더 늘어난다고 주장했지.
케인스는 자신의 신념을 알리기 위해 <네이션 앤드 아테네움> 신문사를 인수했어.
그리고 <네이처>로 개명을 하고 정책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펼쳤어.
여담으로 이 신문의 편집인으로 버지니아는 자신이 후원하는 시인을 고용해 주길 원했어.
케인스는 이를 승낙했지만 그 신인은 특수직 은행원이었는데 3 개월뒤에나 퇴직할 수 있었어.
그래서 결국 그는 채용되지 못했는데 그의 이름은 바로 T.S 엘리엇이라고 하는구나.
미국은 도스안 플랜으로 유럽의 안정을 꾀했어. 이제 거물급이 된 케인스에게 몰래 먼저 프로젝트 내용을 보내서 분위기를 살폈다고 하는구나. 도스안 플랜은 독일에 자금을 제공하면 독일은 이를 생산에 이용해 프랑스와 영국의 부채를 갚으며 순환한다는 내용이야. 하지만 이런 자금 지원은 제2차 대전의 힘을 길러주는 꼴이 되었어.
06 사회주의로의 입문
케이스는 헨리 노엘 브레일포그가 보내준 그의 저서 《오늘날의 사회주의》를 통해 사회주의의 장점을 찾았어.
하지만 노동조합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다른 특징을 알아본 것이지.
자유방임주의에 대해 그는 타도하기보다는 현명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했어.
즉, 빈부격차를 줄이고 국가 경제를 더 평등하게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
1925년 8월 4일 존 메이너드 케이스와 리디아 로포코바는 결혼식을 올렸어.
블룸즈버리 멤버들은 리디아를 무척이나 질투했어.
이 결혼은 자신들이 케인스의 서열에서 한 단계 멀어진 것이니까. 특히 버지니아 울프가 심했어.
자유당은 노동당에 비해 진보에 있어 뒤떨어졌어. 마치 현재의 한국 민주당처럼 말이야.
민주당도 점점 보수화 되고 있다는 게 느껴지거든...
케이스의 바람과는 달리 1925년 4월 28일 처칠은 파운드의 금본위제 복귀를 선언했고 즉각적인 재앙이 뒤따랐어.
영국 산업의 경쟁력은 떨어졌고 곳곳에서 파업이 거세게 일어났어.
케인스는 누군가에게 충성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신념에 따라 말과 행동을 했어.
그 결과 오랜 시간 동맹이었던 애스퀴스를 등지게 되었고 로이드 조지의 동반자가 되었어.
그리고 자신의 정책을 펼칠 기회를 얻었지.
그는 거대한 정부 지출을 통해 실업률을 낮추고 자금이 선순환하도록 만들어 영국 경제를 살리려는 계획을 했어.
케인스는 정말 천재구나... 그는 남들이 모두 바라보고 있는 반대 방향을 보며 해결책을 얻었어.
케인스가 경제학자로서 평생 공식화하려고 애썼던 주목할만한 통섭의 작업이었다. 어떻게 하면 버크의 실용적이고, 위험 회피적이며, 반혁명적인 보수주의를 루소의 급진적 민주주의의 이상과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을까? 요컨대 그는 프랑스혁명 이후로 철학자들이 극단적으로 다르게 이해했던 두 가지 정치 이론의 전통을 통일시키려고 애썼다.
07 대공황
1929년 처칠이 뉴욕을 방문할 즈음 주식 시장이 대폭락 하며 대공황의 서막을 열었어.
케인스는 미국 경제가 난국에 접어들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를 보았어.
먼저 금융권이 불안해지면서 기업들이 사업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자 직원들을 해고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이는 다시 악순환으로 이어졌지.
케인스는 경기 침체가 심각할 경우는 정부가 공공사업 프로젝트를 주도해 국내 투자를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런 혁신적인 제안을 귀담아듣는 정치가는 없었어.
케인스는 고대 화폐에 관한 연구에 빠져 살았어. 그리고 고대부터 인플레이션은 꾸준히 발생했으며 이는 결국 정치와 연관이 있었던 거지.
그가 이제는 중앙은행이 그보다 더 중요한 다른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을 의도적으로 일으켜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었다. 이제 그 목표는 물가 안정이 아니라 지속적인 투자와 실업 문제였다. 필요하다면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실업률을 완화하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추구해도 된다는 주장이었다.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경제 위기는 새발의 피였고 진짜 위기는 독일에서 진행되고 있었어.
그토록 케인스가 주장한 전쟁 배상금의 감면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는 독일에서 히틀러를 부상하게 만들었어.
그 결과는 세계 역사상 가장 끔찍한 거대한 전쟁을 만들어 낸 것이지.
케인스의 열정적인 기질은 대부분 사상의 힘에 대한 지속적인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10년 동안 전후 세계의 경제적 고통에 대해 생각해 왔고, 그런 세계적 재난이 단순한 지적 오류로 발생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엄청나게 거대한 문제들이었지만 거기에는 간단하고 고통 없는 해법이 존재했다.
결국, 경제의 위기는 지적 오류, 정치의 무능함이 만들어 내는 듯하구나.
우리나라의 경제 정책도 살펴보면 모든 면에서 그저 서구를 따라 하는 참신하지 못한 방법들로 채워져 있어.
그만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있어도 과거의 감옥에 갇혀있는 권위자들에 막혀 제대로 뜻을 펼칠 수 없겠지.
특이하게도 케인스와 마르크스의 좋은 사회에 대한 비전은 비슷했어.
다만, 버크의 영향을 받은 케인스는 혁명보다는 개선을 우선 시 했어.
여기서 자유당과 노동당의 정책과 반대되는 관세를 통한 자국 번영의 기틀 마련은 자신의 기반인 정당을 배신하는 결과를 낳았어. 자신의 배경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신념을 펼칠 수 있는 케인스! 아빠는 이런 점이 참 존경스럽단다.
오스트리아의 중앙은행이 뱅크런으로 파산하자 이 여파는 독일로 옮겨갔어.
독일은 미국과 유럽이 모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더 큰 문제를 야기했어.
이에 대책은 모두 단기적이고 임시적이었어.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지 않았던 거야.
08 불사조 케인스
케인스는 자신의 정책을 펼치는 방법을 바꿨어.
대중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닌 학자를 상대로 설득에 나섰지.
이는 학술지에 자신의 정책을 펼쳐서 다른 학자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었어. 그 학자들의 힘이 필요했던 거지.
한편 미국은 부패에 휩싸여있던 은행들이 하나둘씩 무너지기 시작했어.
급기야 은행 시스템을 셧다운 시키기까지 했어.
이때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다양한 사상을 가진 인재들을 바탕으로 경제 침체를 벗어나려는 과감한 정책을 펼쳤어.
프랭클린의 대통령 취임사 중 오늘날 가장 많이 기억되는 것은 첫 구절이다.
"우선 저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대상은 두려움 그 자체라는 제 굳은 믿음부터 강력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막연하고, 이유도 없고, 부당한 두려움이야말로 후퇴를 전진으로 바꾸는 노력을 마비시키는 테러와 같습니다."
위의 루스벨트 대통령의 취임사 중 일부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어. 때론 우리도 두려움 그 자체의 공포심 때문에 꼼짝도 못 하고 있을 때가 있으니까...
미국은 루스벨트의 정책으로 점점 금본위제에서 탈피하고 있었어. 그리고 부실한 은행들은 도산하게 두었지.
이런 루스벨트의 정책을 유심히 보아온 케인스는 지적 궤도에 그를 편승시킬 방법을 찾았어. 일단 그의 측근을 이용하고 그를 치켜세우는 것으로 목적을 이룰 수 있었어. 케이스의 이론을 들은 루스벨트는 앞에서는 훌륭한 생각이라 이야기했지만 속으로는 비현실적인 신비주의자로 생각했어.
케인스는 경제학자들에게 자신의 이론을 설득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어.
09 희소성의 종말
케임브리지에는 케이스를 추종하는 모임이 만들어졌어.
이들은 리처드 칸, 피에도 스라파, 제임스 메이드, 로빈슨 부부로 이루어졌고 그중 조앤 로빈슨은 구시대의 이론을 타파한 수재였어. 이들은 케인스의 이론을 비난하는 학자의 이론의 약점을 찾아 공격했어. 케인스의 든든한 구원군이었지.
또한 케이스가 블룸즈버리 모임에서 점점 멀어지는 공백을 이들이 완벽히 메웠어.
케인스는 경제는 자연스럽게 침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했어.
무엇보다 번영은 인류에게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리더십에 의해 조정되고 유지되어야만 한다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명확하고 단순한 진리를 증명해 냈다는 점에서 천재성이 엿보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이 나오기 전까지는 경제학은 희소성과 효율성에 초점을 맞췄어. 즉, 부족한 자원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빈부 격차가 난다는 것이지. 하지만 자본주의의 기술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발달하고 뛰어난 생산력이 고전 경제주의의 이론을 갈아치워 버렸어. 이는 분배의 문제가 생긴다는 거지.
케인스는 저축이 전반적으로 사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지만 대중의 소득증대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어. 그리고 그는 자신이 부의 극심한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사회의 근거 중 하나를 제거했다고 믿었어.
10 희소성의 종말
리튼이 죽고 난 뒤 몇 년 뒤 케인스 또한 건강이 악화되었어.
1937년 5월에는 부모님 집에 가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지기도 했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바네사의 아들인 줄리안이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에 대항하여 운전병으로 항전하다 전사했어.
케인스는 평화의 방향으로 정치가 이루어지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독재자들의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전쟁뿐이라는 점을 알았어. 유대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지만 그만큼 유대인 친구가 많았어. 아마도 탐욕적인 유대인을 많이 보아서 그런 듯해.
한편, 미국의 루스벨트는 재정적자를 내지 않기 위해 공공지출을 억제하며 경기가 다지 침체에 빠지게 됐어.
미국의 부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규제, 세금 인상 등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루스벨트를 공격했어.
아빠는 루스벨트에 대해 잘 몰랐는데 참 용감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미국의 개혁을 위해 부자의 편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했으니까.
케인스는 루스벨트에게 편지를 보내 철도나 주택 공급의 정부 주도 사업을 진행하라고 조언했어. 그리고 루스벨트는 이를 따랐어.
루딜 정책은 재정적자로 경기를 부흥했어. 이는 결국 자원의 희소성으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 아닌 잘못된 정책 때문이라는 것을 밝혔어. 하지만 부자들은 정부의 공공 정책들을 공격했어. 이들을 대변하는 사람은 영웅 대접을 받았겠지.
《일반이론》은 이런 개혁가들에게 지적 정당성을 제공했다. 다시 말해, 보다 평등하고 민주적인 방향으로 사회를 개편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가능할 뿐만 아니라 번영을 광범위하게 확산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과학적 확신을 심어주었다. 뉴딜정책의 성공으로 케인스의 국제적 명성은 더욱 공고해졌고, 케인스의 사상이 유럽 전역에 번지고 있던 전체주의 방법론에 의존하지 않아도 실효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증명했다.
11 전쟁과 반혁명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영국은 미국의 무기를 수입해야만 했어.
그러나 자금에 한계가 있었어. 영국 외교관들은 모든 것을 해 본 뒤 마침내 케인스를 소환했어.
케인스는 영국을 대표하여 미국과 협상에 들어갔어. 성향이 다른 각 경제 부처와의 협상은 당황스럽게 했지만 이를 마무리했어.
전쟁 중 물가관리국의 케인스의 경제 정책을 따라 펼쳤지만 의회의 반대에 부딪혔어. 그리고 리언 헨더슨이 물러나고 자리를 물려받은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마저 물러났어. 부자들과의 싸움은 길고도 지루하지. 그리고 대부분 부자들의 승리로 끝나고 말이야.
생산활동의 전부를 전시 활동 체제로 돌리고 기업계의 불만은 폭발했어.
이는 정치적으로 민주당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어.
전쟁은 빈곤으로부터 벗어날 자유를 주창한 루스벨트에 대항한 엘리트들을 결집하게 만들었어. 이는 강력한 보수주의 집단을 탄생시켰지.
12 좋은 삶을 위한 열사
1944년 케인스는 재무장관, 킹스칼리지 회계 관리자, <이코노믹 저널>의 편집자, 음악예술장려협회의 의장 역할을 했어.
그의 건강이 온전할 수가 없었어.
여름에 국제협의를 위한 회의를 워싱턴에서 하고 싶지 않아 미국 측에 다른 곳에서 하기를 전달했어.
결국 뉴햄프셔 시골의 외딴 마을인 브레튼우즈에서 열렸어.
이곳에서 케인스는 그야말로 불철주야 일에만 몰두했고 결국 쓰러지기도 했어.
이론적으로 갈등을 겪고 있는 하이에크는 케인스주의가 공산주의로 가는 길이라 외치며 출판한 책이 미국의 뉴딜주의에 신물이 난 엘리트 계층의 이해와 맞아떨어졌어. 하이에크를 앞세운 여러 추종자들은 서서히 케이스주의자들을 무너뜨릴 토대를 쌓아갔어.
케인스는 무역 불균형으로 수입을 많이 하여 가난해지나 만큼 다른 나라는 그만큼 부유해진다는 것을 알았어.
때문에 국제 무역의 비정상적 변동을 관리하려면 전 세계를 아울러 자금 공급 및 통화와 무역 흐름을 규제하는 초국가 은행을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했어. 이 이론을 그의 오랜 적수조차 탁월한 생각이라며 칭찬을 했어.
물론 미국은 이런 계획에 결부되는 것을 원치 않았지. 케인스의 영국에게는 필요한 조치였지만...
일반 대중에게도 엘리트들의 전유물이었던 오케스트라 음악 등 예술을 라디오를 통해 전달했고 예술 부흥에 힘썼던 케인스는 마지막 산책을 즐긴 뒤 얼마 뒤 숨을 거두었어.
13 보수 특권층의 반격
일리노이 대학으로부터 번진 케인스주의에 대한 혐오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어.
이는 엘리트들과 기업들의 전폭적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심지어는 케인스주의자들을 공산주의자들로 몰아붙이며 청문회까지 열었어.
불어난 대학생들의 교과서를 쓴 로리 타시스는 케인스주의자였어. 그가 쓴 《경제학의 요소들》은 대부분 대학의 경제학 교과서로 쓰였지만 보수층에 의해 끌어 내려졌어.
그리고 이런 활동은 그 정도가 더 심해지며 그들의 그토록 증오했던 공산주의처럼 경제학의 한 색깔만을 옹호했어.
그리고 부익부빈익빈을 정당화하는 신경제주의를 외치며 착취에 집중했어.
14 풍요로운 사회에 가려진 민낯
케인스는 역사적 대가들의 이론에 반론을 드는 일을 즐겼어.
경제학이 현실을 무시하고 추상적 개념으로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어. 그래서 수치보다는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품고 특정 형식을 구현하는 것보다 단순한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어.
미국의 보수주의자들도 과장된 몸부림에 케인스주의자들은 은밀히 명맥을 유지했어.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나 폴 새뮤얼슨 등에 의해 오해가 풀렸어.
그리고 갤브레이스가 쓴 《부유한 사회》는 케인스 사상을 분명히 보여주며 미국 사회에 반향을 일으켰어.
개개인은 부자가 되지만 공유지는 처참하다는 내용은 상업적 산물에 더 긴밀히 연결되면 될수록 공동체 구성원과는 더 멀어지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우리 민서, 명서도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 빠져 있지만 이럴수록 진정한 관계는 더 소원해진다는 점을 생각해 보렴.
15 끝의 시작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가 하버드에 있었을 때 존 F. 케네디가 그의 제자로 들어왔고 이는 강력한 정치적 연결이 되었어.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는데 갤브레이스는 싱크탱크가 되었고 결국 그의 최측근이 됐지.
이는 뉴딜 정책을 다시 펼칠 수 있다는 의미였어.
갤브레이스와 새뮤얼슨은 둘 다 케인스주의자지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달라.
갤브레이스는 케이스주의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데 중요한 사상적 밑거름을 제공한다고 생각했고 새뮤얼슨은 경제학은 오로지 숫자로 통계를 내고 그 현상을 풀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어.
이런 면에서는 갤브레이스가 케인스주의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케네디는 근본적으로 케인스주의를 적용하지 않았어. 감세 정책으로 부자들에게 혜택을 주었어.
케네디가 암살당한 후 뒤를 이은 린든 존슨은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존경한 인물이었어.
그리고 에너지와 실험정신으로 가득 찬 프로젝트를 전개해 나갔어.
하지만 1960년대 말은 케인스주의는 한물간 경제 이론이 되었어.
16 19세기의 부활
밀턴 프리드먼이라는 걸출한 경제학자가 등장하고 그는 하이에크 주의자였어.
그가 정계에 영향을 미치며 다시 신자유무역은 정책의 중심에 서게 되었지.
그는 철저히 케인스주의를 부정하며 다른 정책을 옹호했어.
케인스주의 이론도 모든 시대적 상황에서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어. 환경이나 시대에 따라 때로는 하이에크 주의가 올바르게 보일 때도 있었어.
하지만 그런 프리드먼도 자신이 얼마나 케인스주의에 의존하고 있는지는 밝히지 않았어. 그의 통화주의는 케인스 이론에 나오는 내용이기 때문이야.
리처드 닉슨은 베트남 전쟁 중 물가 통제 전략으로 경제를 이끌었어. 이는 결과적으로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을 낮추었어.
갤브레이스는 물가 통제가 잘못된 정책이라 비난해쏘 경제학자들은 이제 실업률 증가와 인플레이션 상승이라는 두 가지 현상을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불렀어.
17 제2의 도금시대
1990년에도 경제학자들은 케인스주의자들을 믿지 않았어.
클린턴은 중도주의를 걸었어. 북미자유무역협정을 통해 예상된 긍정적 결과는 처참히 무너졌어.
세계화를 이끌었지만 이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가속화시켰을 뿐이야.
세계의 빈곤층은 오히려 더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어.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믿었지만 위와 같은 결과만을 보았을 뿐이야. 과연 누구를 위한 정책이었을까?
케인스가 추구한 모두가 이익을 받을 수 있는 정책과는 아주 거리가 먼 방법이었어.
아무리 20세기 경제학을 크게 지배했다 할지라도, 적자지출같이 익숙한 도구로 관리되는 완전고용이라는 목적은 새로운 변혁의 시대에 맞는 새롭고 대담한 "대체 패러다임"으로는 기묘하고 불충분해 보였다. 케인스의 시대는 끝난 것 같았다.
이후 부시와 오마바는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와 케인스주의를 함께 사용했어.
케인스가 꿈꾸었던 정치와 권력으로 세상이 좀 더 평등하게 분배되는 유토피아는 오질 않을 확률이 높아.
그건 인간의 상대적 탐욕 덕분이야. 아무리 절대적 가난이 몰아친다 해도 옆 사람보다 내가 조금 더 형편이 나으면 안도감을 느끼는 존재이니까.
그렇기에 더욱 우리는 타인보다 '나'에 집중해야 해. 나의 발전, 윤리, 도덕심, 절대적 행복에 집중하며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단다. 그리고 케인스와 같이 오지 않을 세상이라도 꿈을 꾸며 그곳으로 가는 즐거운 여정을 상상해야 해.
책의 번역이 더 매끄럽고 오타가 줄었다면 더욱 괜찮은 책 내용이었을 것 같구나...
2023.12.03.13:34.... 민서, 명서는 치즈케이크를 먹고 각자 방에.... 점점 더 추워져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 우리 민서, 명서를 사랑하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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