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한국통사
글: 윤민정
그림: 김용회
독서기간: 2015.10.13~10.17
민서, 명서야, 오늘은 우리나라의 쓰라린 아픔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한국통사》에 대해 이야기할까 해.
보통, 통사(通史)는 시대를 한정하지 않고 전 시대와 전 지역에 걸쳐 역사적 줄거리를 서술하는 양식을 말해. 그런데 이 책에서의 통사(痛史)는 통자가 '아프다, 통증을 느낀다'의 아플 통자야. 다시 말해 《한국통사》는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에 대해 쓴 책이야. 이 책의 주요 배경은 고종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직후인 1864년부터 한일합병 직후인 1911년까지야.
박은식은 1859년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태어났어. 박은식의 아버지(박용호)는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는 훈장님이셨어. 박은식의 할아버지가 농사를 열심히 지어 아버지는 글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었고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훈장이 되었던 거야. 박은식의 아버지는 일찍 공부하면 오래 못 산다고 박은식을 열 살에 서당에 입학시켰다고 해. 박은식 위로 형이 넷 있었는데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집안에서는 건강이 가장 중요했어. 입학은 늦었어도 글재주가 뛰어나 총명하다는 소문이 자자했어. 자신의 공부방에 주자의 영정을 걸어놓고 매일 아침 절을 올리는 것으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해. 박은식의 스승이기도 했던 아버지가 1887년에 돌아가시자 효심이 지극했던 박은식은 약속했던 연안 이 씨와의 혼인을 미루고 삼년상을 치렀어. 박은식은 관직에 나가기 바랐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과거 공부에 매달리지 않고 여행을 다니며 다양한 학문을 배웠어. 특히 스물두 살이 되던 1880년에 경기도 광주로 가서 다산 정약용의 제자인 신기영과 정관섭 등에게서 다산의 학문을 배웠어. 처음에는 이론에 치중한 주자학을 배웠지만 이때에는 정약용의 학문에 관심을 기울이며 현실 문제에 관심이 깊은 양명학을 연구하며 개혁적인 사고를 키웠어. 효심이 지극했던 박은식은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과거에 응시하기도 했어. 1885년 과거에 합격했지만 벼슬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어.
1898년 지금의 서울로 오면서 어지러운 나라를 위해 많은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1898년 3월에는 독립협회에 가입해 민중운동을 시작했고 만민공동회의 간부급 지도자로도 활동했어. 1898년에 민족지사들과 <대한 황성신문>을 인수, <황성신문>으로 이름을 바꾸어 창간. 보급했어. 박은식은 장지연과 함께 주필이 되었지. 박은식은 한일합병 후 신문이 폐간될 때까지 언론투쟁을 했어. 박은식은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 서북 협성학교와 오성학교의 교장을 맡아 신교육과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전국에 63개의 학교를 설립했어. 그러다 마침내 1910년 8월 한일합병이 되면서 주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말았어. 일본이 민족운동 세력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지만 박은식은 사회의 선각자로서 소임을 다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중국으로 망명을 결심했어. 망명 후 박은식은 역사책을 쓰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갔어. 박은식은 민족고대 발전사를 연구하기 시작했어. 저서로는 《동명성왕 실기》, 《개소 문전》, 《발해 태조 건국지》 등이 있어.
1915년에는 망명하면서 집필을 시작했던 《한국통사》를 상하이에서 출판했어. 그리고 《안의사 중근전》도 완성해. 1925년 3월에는 제2대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임되어 독립운동을 지휘하게 되었어. 박은식은 분열된 독립운동을 결속시키기 위해 노력했어. 그 결과 대통령 책임 지도체제를 국무령 중심으로 하는 내각책임제로 헌법을 고쳤어. 그리고 국무령을 선임하고 스스로 대통령을 사임하며 국정에서 물러났어. 이때 박은식은 "나는 임시정부의 심부름꾼이면 족한 사람이야. 애국은 조용히 실천하고 남모르게 하는 거야"라고 말했단다. 어때 민서, 명서야... 대가를 바라지 않고 목숨마저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야말로 자신의 신념이 매우 강한 거지. 저런 분이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어야 하는데 늘 사리사욕이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니 우리나라도 어떻게 여기까지 왔겠니.... 이젠 박은식 같은 분들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권력을 가지기 위해 모든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해. 그 권력을 가져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정책을 펼치는 것이 최종의 임무라고 아빠는 생각한단다. 세계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런 분들이 권력을 가지고 나라와 국민의 질을 올려놓은 사례가 많단다. 박은식은 대통령 지위에 있을 때도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수수했어. 그래서 어떤 때에는 임시정부 청사로 들어가다가 외부인으로 오해받아 경비원에게 목덜미를 잡혀 조사당하기도 했다고 해. 병색이 깊었던 박은식은 나라의 독립을 기다려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 지혈사》의 맥을 잇는 《광복사》를 쓰고 싶어 했어. 하지만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떴지. 박은식은 죽는 순간에도 나라를 걱정했어. 민족의 결속에 대한 당부를 남기고 염원하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25년 11월 1일, 67세로 상하이의 한 병원에서 돌아가셨어. 나라를 빼앗겨 돌아오지도 못했던 구국으로 1993년 8월 5일, 68년 만에 돌아와 국립묘지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안장되었어. 1962년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했지만 1945년 광복을 맞이한 것에 비하면 너무 늦었지.
책의 내용에 대해 살펴보자꾸나. 아픈 역사의 시작이라고 했던 흥선대원군의 섭정에 대해 먼저 살펴보면 흥선대원군이 등장한 시기는 외척으로 인한 세도정치와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부패해 어려운 시기였어.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왕실의 위엄을 바로잡는 일이었어. 그래서 경복궁을 중건하는 일이었는데 대신들의 간언도 듣지 않고 공사를 강행했는데 공사 도중 불이 나 모두 타버리고 말았지. 그리고 다시 지으려 원납전이라는 강제 기부금을 징수하고 당백전을 발행해 비용을 충당했어. 또 왕권강화를 위해 외척을 배제하고 당쟁을 소멸시켰어. 외세를 배척하는 분위기에서 독일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는 사건까지 생겼어. 대원군의 외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더욱 굳어지고 배외 사상은 더 높아지게 됐어. 박은식은 대원군의 오만으로 강국이 될 시기를 놓친 것이 통탄스럽다고 했어. 아빠 생각에도 국제 정세와 현실적인 문제만 생각했어도 이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것 같아. 외세에 대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렸지...
신식 군대에 비해 구식군대의 차별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는데 이때 한 때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장악했으나 민 씨가 청에 군대 파견을 요청해 청의 군대가 와서 난을 진압하고 대원군도 청으로 압송했어. 그리고 이를 빌미로 일본 군대도 우리나라에 상륙했지. 이를 계기로 외정의 간섭이 심해지기 시작했어. 이미 이때는 시기가 늦어버린 거야... 우리 힘으로 우리나라를 지킬 힘을 기를 시간이...
1884년 갑신년에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의 개화당에 의해 갑신정변이 일어났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 박은식은 이 정변의 실패를 몹시 애석하게 생각했어. 갑신정변으로 개화당에 속한 자들이 모두 제거되니 남은 자들은 아첨과 사치를 일삼는 외척들뿐이었어.
1894년 갑오년에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는데 고종이 청나라에 군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고 톈진 조약에 따라서 일본도 군함을 이끌고 인천에 도착했어. 그리고는 청. 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왕권 약화와 내각의 권한 강화를 이루어 냈어. 점점 일본의 야욕이 드러나고 한발 한발 조선에 내딛고 있었지...
급기야는 1895년 일본의 '여우사냥'이라는 작전명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했단다. 이는 우리나라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도 없다는 증거야. 어떻게 한나라의 국모를 다른 나라 군대가 죽일 수 있었을까? 조선은 힘이 없었어.... 물론 고종과 민 씨는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삶이 힘겨울 때 궁에서 잔치를 벌이고 미신을 믿어 굿을 하고 흥청망청 놀기 바빴지. 훌륭한 사람이라 결코 말할 수 없지만 조선 상징의 한 명을 죽이다니.....
이후 조선의 여러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눈치를 보며 자구책을 마련하려 하지만 늘 일본의 감시가 있고 열강들은 자신의 이익으로 상황을 판단했기 때문에 모든 게 쉽지 않았어. 결국 일본은 조선의 경제침탈을 통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고 한일합방을 하지. 그리고는 고종도 퇴위시킨단다. 우리나라를 일본에 판 을사 5적을 잊지 마렴.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야. 결국, 이들의 활약(?)으로 우리나라는 일본에 합병돼.......... 박은식이 광복되는 걸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신 게 참 애석하구나.
광복 후부터 지금까지 일제시대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해 아직도 우리나라는 혼란에 휩싸여 있단다. 나라를 팔아넘긴 일제 앞잡이의 자손들은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고 독립운동으로 목숨을 바친 독립의병들의 후손은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우리나라 대한민국. 민서, 명서가 생각하기에도 뭔가 이상할 거야...
민서, 명서야... 지금 세상도 일제 강점기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우리를 보호해주리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우리 스스로가 강해져야 살아남는 단다. 우리 같은 일반 국민들은 스스로 강해지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간신히 먹고사는 세상이야.... 참 서글픈 역사와 현실이야...
2015.10.18 일 11:28... 민서, 명서는 <보안관 칼리의 서부 모험>을 보고 있을 때.....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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