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자본론(마르크스)
글: 최성희
그림:손영목
독서기간: 2015.12.15~12.18
민서, 명서야... 오늘은 19세기 영국의 노동자들의 힘겨운 삶을 보며 자본가에게 경각을 일깨워준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해.
아빠는 그저 마르크스 하면, 공산주의를 외친 사람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보며 마르크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단다. 아빠도 어릴 때는 학교에서 공산주의는 악마라고 세뇌를 받아서 마르크스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야.... 이래서 많은 책을 보며 생각을 해 봐야 내가 보는 하늘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되는구나...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모젤 강변에 위치한 라인 주의 작은 도시 트리어에서 태어났어. 마르크스의 아버지인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변호사 출신이었어. 유대인 집안이었지만 유대인들에 대한 편견이 심했던 독일에서 차별받지 않으려고 마르크스가 태어나기 전에 기독교의 한 파인 루터파로 개종했지. 마르크스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별로 개의치 않았어. 기독교에 대해서도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 오히려 종교에 대해 아주 부정적이었어. 트리어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법학을 전공하기 위해 본 대학에 진학했어. 하지만 낭만파였던 마르크스는 시와 문학, 예술에 심취했지. 그러자 마르크스의 아버지는 마르크스를 베를린 대학으로 전학시켜 버렸어. 마르크스는 공부는 뒷전인 채 당시 베를린 대학을 휩쓸던 '헤겔 철학'에 깊이 빠져 들었지. 그러던 중 마르크스가 20살이던 1838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어. 집에서 보내 주던 용돈마저 끊기자 마르크스는 하기 싫은 법학 공부에서 완전히 손을 뗐어.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에는 동의를 했지만 절대정신에는 동의하지 않고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받아들여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발전시킨단다.
마르크스는 박사 학위는 받았지만 프로이센 정부에 반대하는 학생 운동 경력 때문에 대학 교수직을 얻을 수 없었지. 1841년에 미련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어. 그러고는 한동안 <라인 신문>에 글을 기고했지.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정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글로 명성을 떨치며 <라인 신문>의 편집장 자리에 올랐어. 물론 신문도 유명해졌지. 하지만 신문은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폐간되고 프로이센에서 쫓겨나고 말았지. 이때부터 마르크스 인생에서 추방과 감시, 도망의 인고의 세월이 시작된단다. 우리 민서, 명서 같으면 어떨 것 같니? 아빠는 벌써 아빠의 의지를 포기하고 프로이센 정부가 무서워 가만히 있었을 거야. 그만큼 마르크스의 의지는 강하고 확고했어. 그래도 마르크스는 혼자가 아니었어. 부유한 관리의 딸인 예니와 함께 고난을 겪으며 삶을 헤쳐나갔어.
마르크스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서 중요한 두 가지를 만났단다. 하나는 공산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론 탄생을 가능케 한평생의 동지 엥겔스지. 19세기 당시 파리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서 시작된 혁명의 열기가 절정에 달해 있던 도시였어. 차별 없는 평등 세상을 바라는 혁명가들이 각국에서 몰려들었지. 사유재산 없는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사상가들과 함께 마르크스도 그런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프랑스에서 <독일 프랑스 연보>라는 잡지를 펴내면서 급진적인 공산주의자로 변모한 마르크스는 1844년 파리의 한 카페에서 엥겔스를 만났어. 두 사람은 혁명과 공산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서로 생각이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엥겔스는 프로이센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고 공산주의자의 길을 가게 되었어. 엥겔스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리는 마르크스를 평생 동안 도와주었어. 그리고 마르크스를 대신해 자본론 2,3권을 완성한 사람도 엥겔스야. 아마 그런 엥겔스가 없었다면 마르크스의 인생은 미완성이었을지도 몰라. 민서, 명서야, 전에 읽었던 사기열전에서 포숙과 관중 이야기 생각나니?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보니 포숙과 관중이 생각나는구나.... 엥겔스는 포숙과 같은 품성을 가진 거 같아...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왕을 조롱하는 글로 1845년 정치적인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2년 동안 브뤼셀로 쫓겨나지만 결국 추방당하고 말았어.
마르크스가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활동가가 된 건 1848년 런던에 만들어진 국제 노동자 단체 '공산주의 동맹'에 들어가면서야. 런던에서 대영박물관 고정 좌석에서 마르크스는 거의 매일 아침 9시에서 저녁 7시까지 경제학 연구에 몰두했어. 하지만 무일푼인 그에게는 어둡고 긴 고통의 터널이었지. 약값이 없어 자녀들을 병으로 잃어야 했어. 글 쓸 종이를 못 사 원고를 못 쓴 적이 있을 정도라고 해. 영국에서 '국제 노동자 협회'를 엥겔스와 같이 이끌었지만 파리 코뮌이 실패로 끝나면서 손을 떼고 16년 동안 대외적인 활동에서 한발 물러나 살았어. 요양 중이던 마르크스는 1881년 아내 예니가 세상을 떠날 때 병석에 누워 있어서 장례식에 참석하지도 못했어. 그리고는 1883년 3월 14일, 마르크스는 65세의 나이에 폐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어. 그의 장례는 분신과도 같았던 친구 엥겔스가 손수 치러 주었지.
<자본론>의 핵심은 노동자들이 필요 노동시간외의 잉여 노동시간으로 인해 잉여가치가 발생하지만 이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독식한다는 거야. 19세기 영국의 노동자들은 산업화의 물결로 인해 기계의 도입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져서 노동자는 거리로 내몰리고 있었어. 그러면서 노동력이 풍부해지자 자본가는 노동착취를 일삼았지. 그러면서 자본가들은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꾸준히 불변 자본에 자본을 투입하며 잉여가치를 높이려 하지. 그 과정에서 상대적 과잉인구가 발생하며 노동자들의 임금은 더욱 내려가지. 마르크스는 결국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인해 자본주의는 무너질 것이라고 예견했어. 자본가들이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계속 경쟁하면서 결국 상대적 과잉인구가 많이 발생이 되고 노동자들의 소비여력이 떨어지면 상품이 팔리지 않고 자본가들이 하나둘씩 연쇄적으로 무너진다는 거지. 물론 현재 자본주의는 많은 위기를 겪으며 아직까지 살아남았어. 하지만 현재의 자본주의를 보면 양극화가 심화되고 여러 모순들이 발생되는 것을 보면 아빠 생각으로는 마르크스의 예상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거 같아. 자본가와 노동자가 함께 잘 살아가는 길은 없는 것일까? 자본가들의 끝없는 탐욕은 언젠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해.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의 묘비에는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는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라는 구절은 지금 여기 대한민국에도 필요한 말이야. 아빠가 좋아하는 묘비명 하나 더 쓰고 마칠게. 철학자 칸트의 묘비에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 중에서 살펴보면 볼수록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한 가지는 별이 총총 떠 있는 하늘이고, 다른 한 가지는 내 마음속에 늘 살아 있는 양심이다. 이를 통해서 나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
2015.12.19.11:40.... 민서는 짱구 보고 명서는 책 보고 있을 때...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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