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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서울대 인문고전 48-철학적 탐구(비트겐슈타인)

삶의 기쁨 독서 이야기

by Jinnyboy 2016. 4. 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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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철학적 탐구

글: 김면수

그림: 이남고

독서기간: 2016.03.28~04.01


민서, 명서야... 오늘은 기존의 철학은 언어에서부터 잘 못 된 것이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 대해 말해볼까 해...

민서, 명서는 지금까지 읽은 철학에 관한 책들을 읽고 철학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아빠는 어떤 특정한 한 가지로는 말할 수 없지만 인간의 존재 이유를 우리의 삶 저편의 어딘가에서 찾으려고 노력하는 거 같아. 물론 데카르트 같은 위인은 이성에 의해서 많이 찾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우리의 삶 저편을 부정하지는 않았어.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나누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고 스스로 드러나도록 그냥 두어야 한다고 했어.

이렇게 다양한 철학적 접근은 인간을 더욱 다양한 세계에 눈 뜨게 하는 것만은 틀림없단다. 우리 민서, 명서도 다양한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어.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어.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카를 비트겐슈타인인데, 오스트리아에서 손꼽히는 부자 중의 한 사람이었어. 카를은 유태인으로 오스트리아에서 자수성가한 사업가이자 철강 재벌이었지.  카를 비트겐슈타인은 아내 레오폴디네와의 사이에서 5남 3녀를 두었고, 루트비히는 막내로 태어났어. 루트비히의 형과 누나들은 모두 뛰어난 천재들이었단다. 어린 시절엔 오히려 형과 누나들의 그림자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을 정도였어. 나를 제외한 다른 형제들이 이와 같으면 부담이 무척 클 거야... 그렇지.. 민서나 명서중 한 명이 공부를 엄청 잘하면 다른 한 명이 부담이 되지 않겠니? 그런데 그렇다 하더라도 부담을 갖지 말고 자신의 길을 가렴. 그 빛은 언제 비칠지 모르니까...

루트비히의 형과 누나들은 특히 음악과 같은 예술 분야에서 다들 뛰어났지.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당시 유럽 최고의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단다. 하지만 파울은 전쟁 중 오른팔을 잃는 불운을 겪었지. 그래서 라벨이란 유명한 작곡가가 그를 위해 왼손을 위한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해 준 일도 있었어.

1903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린츠 국립 실업학교에 입학하게 돼. 린츠 국립 실업 학교는 일종의 기술학교라고 볼 수 있어. 루트비히는 어릴 적부터 손으로 뭔가를 만들고 기계를 다루는 것을 좋아했어. 하지만 린츠에서 루트비히는 그리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어.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루트비히가 린츠 실업 학교에 입학하고 1년이 지난 후 이 학교에 히틀러가 입학했어. 역사는 이렇게 맞물려 간단다....

1906년 비트겐슈타인은 린츠 실업 학교를 졸업하고 베를린 공과대학에 진학해. 그리고 1908년에는 지금의 MIT처럼 유명했던 영국의 맨체스터 공과대학에 들어가 비행기의 제트 엔진을 연구하게 된단다. 비트겐슈타인은 제트 엔진을 연구하면서 수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 1911년 비트겐슈타인은 결국 프레게가 있던 독일의 예나 대학으로 가서 프레게를 만났어. 프레게는 러셀을 만나볼 것을 권유했고 다시 영국으로 와 케임브리지에 있던 러셀을 만나게 된단다. 비트겐슈타인과 러셀의 만남은 두 사람 모두에게 커다란 삶의 전환점이 되었어. 당시 유행하고 있었던 헤겔의 관념 철학을 극복하고 싶어 했던 러셀은 친구인 무어와 함께 분석 철학의 틀을 만들어 가고 있었어.

비트겐슈타인은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또는 헤겔의 책을 단 한 줄도 읽은 적이 없는데도 철학적 주제에 관한 글을 훌륭하게 썼고 러셀도 놀라워했고 이로써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의 철학도가 되었어.

시간이 지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에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가 되었단다. 1913년 그는 논리학을 좀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 유럽의 변두리인 노르웨이의 시골로 들어갔어. 하지만 관광객들이 찾아와 시끄럽게 굴자 그는 잠시 빈으로 돌아오게 돼. 그러다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었고,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군으로 참전하게 된단다. 그는 일부러 최전선에 지원했고 매우 위험한 상황에 자진하여 뛰어들곤 했단다. 그는 오히려 죽음과 맞서는 경험을 통해 자기 영혼의 자유를 시험해 보고 싶었던 거야. 그는 노트에 틈틈이 글을 쓰기 시작했어. 그것이 후에 그의 전기 철학을 대표하는 저서인 《논리철학 논고》의 원고가 되었단다. 1918년 비트겐슈타인의 조국인 오스트리아는 전쟁에서 패했고, 그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어. 그의 가족들은 돈을 써서 비트겐슈타인을 빼내 올 수 있었지만, 그는 거절했어. 정말 괴짜이지 않니? 러셀은 훗날 미국의 경제 공황을 해결하게 될 유명한 경제학자 케인즈에게 도움을 청해 그 원고를 빼내 오지. 하지만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이해할 수 없었지.

1919년 비트겐슈타인은 수용소에서 풀려나게 돼. 그에겐 막대한 유산이 있었지만 그 재산을 모두 형제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자신에게는 단 한 푼의 돈도 돌아오지 못하게 했지. 아빠 생각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삶에서 돈이 차지하고 있을 부분마저도 비워버리고 철학으로 채우고 싶어서 그러지 않았을까?

1920년 그는 오스트리아의 동북부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 트라텐바흐의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어. 그가 초등학생을 가르치고 있던 1921년에, 전쟁터에서 썼던 원고가 《논리철학 논고》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단다. 하지만 그 책에 실린 러셀의 서문을 비트겐슈타인은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어. 이 일이 있은 후로 두 사람의 우정은 금이 가기 시작했어. 민서, 명서야, 대부분 뛰어난 사람들은 스승의 사상을 깨고 더욱 진화하는 사람이 많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렴...

비트겐슈타인의 시골 교사 생활도 그리 순탄치 못했지. 그는 학생들에게 너무 낮은 기대를 걸었어. 1926년 결국 교사직을 포기하고 만단다. 잠깐 동안 수도원의 보조 정원사로 일하기도 했지. 그러다가 막내 누나인 마르가레테가 살 집을 건축하는 일에 참여했어. 비트겐슈타인은 그 집을 철저하게 논리학적 정신을 구현하여 설계했고 그 집은 '비트겐슈타인 하우스'로 불리며 1970년대에 오스트리아의 문화재로 지정되었어.

1929년 비트겐슈타인은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오게 돼. 특히 그 무렵 영국에 와 있던 이탈리아의 경제학자인 스라파와의 대화는 그의 생각을 더욱 확실하게 해 주었어. 그는 케임브리지에 돌아와서 박사 학위를 받고 강의를 시작하게 돼. 그리고 새로운 사유들을 계속하게 되지. 이러한 사유의 결과물들은 그의 후기 철학을 형성하게 되고 그가 죽고 난 뒤 《철학적 탐구》라는 책으로 나오게 된단다.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에서 거의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게 돼. 1941년에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7년 케임브리지의 교수직을 그만두었어. 그러곤 아일랜드의 시골 마을에 가서 그의 후기 철학적 사유에 전념하게 되지. 그는 1950년 마지막으로 자신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빈에 들러 가족들과 만났어. 1951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비트겐슈타인은 건강이 매우 안 좋아졌어. 그리고 그해 4월 27일 그는 '확실성에 관하여'란 마지막 글을 쓴 후 의식을 잃었고 4월 29일 아침 세상을 떠났단다.

 

비트겐슈타인의 관심은 일관되게 '언어'에 관한 것이었어. 철학의 문제를 언어의 문제라고 보았던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은 '언어 비판적 활동'이어야 한다고 주장했거든. 그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방법은 영국과 미국의 분석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단다.

물론 처음 쓴 《논리철학 논고》와 후기에 다른 깨달음으로 쓴 《철학적 탐구》는 언어와 세계의 관계가 다르게 해석되지만 역시 언어에 관한 것이야.

비트겐슈타인은 그동안의 철학이 우리가 알 수 없는 관념적인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려 한 것 자체가 오류라고 하고 있어. 그리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 안에서도 언어의 의미는 '언어 게임'을 벗어나선 생각할 수 없고 더 나아가 언어의 의미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행하게 되는 수많은 언어 게임에 참여할 때 발생한다고 그는 주장했단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가 모든 개별적인 것들을 하나로 묶고 일반화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일상적인 언어를 불신하고 이상적인 언어의 본질 같은 것을 찾으려 노력했다고 해. 그런데 이런 것들은 세상 그 자체를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인위적으로 하나로 묶으려 하며 무책임한 질문들을 만들어 왔다고 해.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철학적 문제들을 제거하려 했고 우리에게 풍성한 일상 언어의 의미를 되살려 주었어. 그리고 기존의 철학이 추구한 이상향인 변함없고 모든 것들에 내재한 보편적 진리라는 헛된 꿈을 버렸어. 그 대가로 풍성한 일상 언어의 세계를 되찾았지.

 

언듯 보면 이런 글이 세상에 도움이 될까 하고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런 다양한 생각들이 이 책을 발판으로 삼아 더 나은 생각으로 이끌게 된단다. 우리 민서, 명서도 공장 같은 학교의 교육 속에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이 틀을 깨야만 더 큰 세계를 만날 수 있단다.

 

 

2016.04.02... 민서는 폐렴으로 입원하고 명서는 외할아버지 댁에 있을 때.... 명서야 외할아버지 좀 그만 괴롭혀... 할아버지께서 한 숨만 쉬시고 계신단다 ㅠㅠ

 

 

 

 

올해는 우리 가족이 병원이랑 무척 친하게 지내는구나... 명서도 얼마 전 입원했고 우리 민서도 입원하고... 아빠도 그렇고...

그래도 우리 가족 파이팅하자. 이런 고난은 늘 오는 것이니 잘 헤쳐 나가자꾸나.... 사랑해 우리 민서, 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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