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랑을 그리는 숨은 꽃, 데레사
글: 루돌프 쉬테르텐브린크
번역: 김선태
독서기간: 2021.09.15~2021.09.18
민서, 명서야~~ 오늘은 가톨릭의 성녀인 데레사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어. 아빠가 성당에 어릴 적 다녀서 데레사라는 이름은 많이 들었는데 인물에 대해서는 잘 몰라.
프랑스의 리지외에서 살았던 데레사는 15살의 어린 나이로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를 거부당하자 성지 순례를 하다 간 바티칸에서 교황 레오 13세를 알현하며 소원을 말했어.
데레사의 어린 시절은 이기심과 제멋대로 행동했다고 하니 성녀가 된 것이 정말 뜻밖에 놀랄 일이야. 그러면서 우리 민서, 명서도 변화될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생기는구나. ㅎㅎ
하느님은 어린이처럼 순수한 영혼을 좋아한다고 하니 천진난만한 어린이가 되라고 하지. 하지만 아래와 같은 행동에 주의해야 해.
'사람은 어른이 될수록, 그의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변질되고, 이와 더불어 더 협소하고 어둡고 완고한 시선이 될 위험이 많다.'
데레사는 감수성이 아주 깊은 사람이라는 것은 그녀의 글을 보면 알 수 있어.
'데레사는 바다, 석양, 밀 이삭 등을 바라보는 가운데 영원을 조금이라도 느낄 경우, 본향을 갈망했다. 그런 순간에는 오직 홀로 머물고 싶어 했다. 그 순간은 깊은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었고, 내적 기도인 관상에 몰입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데레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저는 위대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늘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앞에서 어린이가 되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자신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등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의지하는 것은 좀 납득이 되지 않아. 인간이 이와 같았다면 아직도 원시 시대로 남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면서 발전해 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책을 읽다 보니 너무 소극적인 자세에 어딘가에 갇힌 듯이 답답함이 느껴지더구나.
데레사는 또한 하느님에게 이르기 위해 작은 길로부터 시작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어. 이는 작은 존재, 겸손한 존재, 가난한 존재로 설명하고 있어. 이중 아빠는 겸손의 존재가 오늘날 많이 잊혔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은 자기 PR시대로 잘난 척하고, 있는 척하고, 멋진 척을 해야 인정받는 시대야. 그렇지만 이런 시대일수록 겸손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야. 우리 민서, 명서도 겸손함을 갖추어야 주위에 사람들이 모일 거야. 아빠도 가끔 겸손하지 못한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 여러 번 그 일을 떠올리며 조심하려 하고 있어. 단기간에 되는 것이 아니니 천천히 심호흡하며 나아가 보렴. 수도원에서 그녀를 시기하는 수녀의 말에 그녀가 행한 겸손함은 본받을 만한 행동이야.
데레사에 대한 이야기 중 아쉬운 점은 1886년 성탄절에 어린이의 모습에서 벗어나 완전히 회심하는 은총을 받았다고 했는데 자세한 내막이 없이 이야기를 풀어가니 궁금하면서도 왜 이렇게 이야기를 전개할까란 의문이 생기더구나.
높은 건물을 짓기 위해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하듯이 높은 차원의 영혼을 만들기 위해서는 낮은 곳에서의 선행이 필요하단다. 《월든》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주변의 사람이 없는 자유를 통해 삶의 기쁨을 누리라고 했는데 데레사는 이와 반대되는 말을 했으니... 어떤 것이 좋을까?
"주변 세계를 피하는 것은 영혼의 생명력을 빼앗는 일입니다. 그러니 속히 이웃 사랑의 업적을 행하셔야만 합니다."
마치 노자와 공자를 보는 듯 하구나. 누가 더 낫다고 이야기할 수 없겠지.
데레사에게서 가장 존경스러운 점은 모든 고통을 기쁨으로 변화시켰다는 거야. 고통에서 한 줄기 기쁨을 발견하여 한 줄기를 여러 줄기로 늘리는 마음은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는 일이야. 이런 모든 고통을 하느님이 일부러 자신에게 주는 것이라 생각했어. 고통은 누구든지 당황스럽고 힘든 경험을 선사하지만 꼭 나쁜 것은 아니야. 왜냐하면 고통을 통한 교훈은 뇌리에 확실히 저장이 되거든. 아빠가 우리 민서, 명서를 걱정하는 가장 큰 이유가 너희들에게 고난이 너무 없다는 거야. 예방 주사를 맞지도 않고 어떻게 세상의 풍파와 맞설 것인지 좀 심난하구나. 아빠는 의식적으로라도 그런 환경을 가끔씩은 만들어 주려 하지만 엄마의 반대 또는 방관으로 어렵기만 하구나.
아빠는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선기능을 한다고 생각해. 물론, 일부 종교가 사회를 혼란케하고 정치에 영향을 주려하면서 순수한 종교의 의미는 잊고 세를 불리는 것에만 집착하지만 말이야. 통계를 보더라도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더 행복감을 느낀다고 하더라.
성녀 데레사는 다른 일을 했더라도 어떤 분야에 고집스러운 장인이 되었을 거라 상상이 되어져.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나를 시기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은 꼭 성녀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을까?
이런 사랑은 결국 우리에게 행복감을 가득 안겨줄 거야. 마음과 실천이 무척 힘들어서 그렇지.^^
2021.09.18.20:38... 민서는 자기 방에서, 명서도 자기 방에서 핸드폰으로 유튜브나 게임하겠지... 조그마한 고난이 너희들을 단련시키기를 바라는 아빠가... 걱정 마렴. 아빠가 너희들 등 뒤에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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