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징비록(유성룡)
글: 박교영
그림: 이동철
독서기간: 2015.09.17~09.19
독서 권유 ★★★★★
민서, 명서야 오늘은 임진왜란에 대한 책인 《징비록》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책을 쓴 유성룡은 1542년 경상도 의성현 사촌리에서 태어났어. 자는 이견(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이야. 그의 아버지 유중영은 황해도 관찰사였고 어머니는 진사 김광수의 딸인 안동 김 씨로 알려져 있어. 그의 형 유운룡은 문과에 여러 번 급제했고 원주목사를 지냈지. 게다가 유성룡의 집안은 명문가로 손꼽히는 안동의 풍산 유 씨 집안이라 가문의 이력이 정말 대단하지. 유성룡은 어릴 때부터 그 총명함이 남달랐다고 해. 4살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했고 6살 때는 《대학》, 《맹자》를 읽고 8살 때는 이미 공자, 맹자의 이치를 다 깨달았을 정도였다고 해. 어려운 책을 볼 때 서당의 다른 친구들은 해설 책을 같이 보고 공부를 하는 데 비해, 유성룡은 어려운 게 나와도 반드시 혼자 몇 번이고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자신의 생각으로 정리하고 나서야 해설 책과 자신의 생각을 맞춰 보았다고 하네.
유성룡은 16세인 1557년에 과거에 급제했고 1562년에는 퇴계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공부하게 되었어. 이황은 유성룡이 학문하는 자세가 매우 바르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의문이 풀릴 때까지 물어보며 배운 것을 통해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며 실천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과연 하늘이 내린 인물이로다'라고 말했다고 해. 이황은 아무나 칭찬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그런 분이 유성룡을 극찬하셨으니 과연 유성룡이 얼마나 뛰어난 인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겠지.
그는 무려 30년 동안 관직에 있었고 차례차례 승진을 거듭해 국정의 거의 모든 분야의 실무를 밟아 나갔어. 그는 조선을 통틀어 가장 많은 관직에 오른 사람이기도 해.
유성룡이 남긴 《징비록》에는 그가 썼던 각종 문서들이 부록으로 담겨 있어. 거기에 그는 "보잘것없는 것이지만"이라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문서를 관리하는 관리자의 자세에 대해서 교훈을 주기도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아무래도 왜적의 상황이 수상해 변란이 있을 것을 예상한 유성룡의 건의가 일부 받아들여졌지. 조정에서도 마냥 손 놓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몇 가지 대비를 했지. 그중 하나가 장수를 뽑는 일이었어. 임금이 누구를 추천해야 하는지 물었는데 당시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형조 정랑이었던 권율을 의주목사로 추천했지. 그런데 훗날 이들은 각각 해전과 행주산성에서 승리를 이끌어 낸 역사적 인물이 되지. 특히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동네에서 함께 자란 절친한 사이로 매일 이순신을 칭찬하며 그를 돕는 데 적극적이었다고 해. 사실 유성룡도 임진왜란 발발 약 10년 전인 1583년 이이가 주장한 '10만 양병설'에는 반대했다는 사실. 본인도 그래서 나중에 이것을 무척이나 후회했어.
징비의 뜻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거야. 즉, 임진왜란이라는 커다란 환란을 기록함으로써 훗날에 다시 올지 모르는 우환을 경계한다는 깊은 뜻이 담긴 것이지. 그런데 이렇게까지 유성룡이 외쳤는데 이 씨 왕조는 다시 일본에게 유린을 당했지. 참 아쉬운 대목이야. 이 책을 읽고 미리 대비했다면 어쩌면 한일합방이라는 치욕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민서, 명서도 이 아빠가 이렇게 책을 읽고 책에 대한 글을 남겨놓는 것이 너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렇게 하지만 너희들이 이 글을 읽고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깨닫는 데 몇 배의 시간이 더 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빠가 너희들에게 재산을 남기는 것보다 이 글들이 너희들에게 더욱 소중한 것을 일깨워 줄 것이라 확신하고 있어. 이 아빠가 틀린 의견을 내면 잘 수정해서 너희들의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렴.
유성룡은 전쟁이 끝난 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내려간 뒤에도 지난 7년간의 끔찍한 전쟁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무척 괴로워했다고 전해져. 그리고 스스로 죄인이라 생각하여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나라를 그르쳤다는 깊은 후회와 반성을 했지. 그는 지난날의 기억을 책으로 남겨 조금이나마 죄를 씻고 후세들이 다시는 이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했지.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가 우리가 겪은 끔찍한 전쟁의 기억을 쓴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만나는 《징비록》이야. 바로 이 《징비록》이 국보 제132호라는 거 알고 있니?
《징비록》은 실제로 일어난 임진왜란 이야기야.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후 명나라를 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어. 그 명나라로 가는 길 가운데 조선이 있었던 거지. 일본은 첩자들을 통해 조선의 지리와 각종 정보를 가지고 전쟁을 일으킬 준비가 되었고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을 일으켰단다. 그런데 조선은 너무나 오랜 평화로 인해 모든 게 해이해져 있었어. 그리고 유교의 영향으로 문신들만 대우를 받고 무신들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전쟁에 대비할 생각도 하지 않았지. 일본은 파죽지세로 서울까지 치고 올라왔고 선조는 북쪽으로 피란을 갔단다. 급기야 최북단까지 피란을 갔고 중국으로 넘어가려 했어. 그것을 유성룡이 완강하게 반대를 했단다. 중국으로 넘어가는 순간 조선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강하게 경고했지. 선조, 임금이란 작자가 나라와 백성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니 그 아래에 모여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뻔했을 거야. 지금의 우리나라처럼 말이야. 이때 유성룡은 외교를 통해 명나라에 군사지원을 요청하고 명나라는 군사를 보내 그나마 평양성을 되찾았지. 결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이 긴 전쟁은 끝이 난단다. 이 전쟁은 늘 그렇지만 전세를 뒤집을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지만 무능한 장수들에 의해 기회를 살리지 못했지. 결국 조선의 힘이 살아나서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거야. 만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때 죽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몰라. 유성룡은 나라의 최고 관리직이라 할 수 있는 삼정승을 지내고 전쟁 중 도체찰사에 올라 전쟁을 총 관리한 사람이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활은 언제나 가난했다는 사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나서는 머물 집이 없어서 아는 절에 부탁해서 숙식을 해결할 정도였다고 해. 그가 1607년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1,000여 명의 사람들이 몰려와서 "유성룡이 아니면 우리들이 지금 이렇게 살아 있지 못할 것이다"하며 매우 슬퍼했다고 하지. 게다가 그는 생활이 너무나 청렴했던 나머지 장례비가 없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제수용품을 싸들고 와서 문상을 했다고 전해져. 그래서 오늘날 유성룡은 훌륭한 재상이자 청렴한 정치가로 존경을 받고 있는 거야.
민서, 명서야... 이 아빠가 전에 말한 우리나라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같은 분이 왜 없는 것일까라고 했지만, 다시 우리의 조상이었던 유성룡 같은 분은 정치권에 왜 없을까로 바꿀 수 있겠어. 지금의 나라 재상들은 재벌 하수인이 되어 일반 노동자들을 중산층에서 밑으로 끌어 내리려 하고 그 대가로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 얻겠지. 즉, 나라와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해 나라를 운영한단다. 이런 분들을 본받아 일반 회사만 봐도 직원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 노사 또는 노조를 하는 사람들....... 이런 식이면 다시 임진왜란이 일어난다면 희망이 없단다. 어서 아빠 회사에도, 나라에도 유성룡같은 분이 나와야 할 텐데......
2015.09.20. 09:54..... 민서, 명서는 '짱구는 못 말려"를 보고 있을 때...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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